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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땅 이름 유래 - 구전내용·오산시사로 살펴본 ‘오산 지명’
  • 기사등록 2012-08-31 18: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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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오산시 세교동(細橋洞)의 옛 명칭은 잔다리 마을이다. 작은 다리가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지명(地名)에는 선조들의 얼과 언어가 살아 숨쉰다. 더불어 옛말과 지방 고유의 사투리가 스며 있다.

 

본지에서는 지역민의 구전과 오산시사(2009년판 1권)를 바탕으로 오산시 지명 유래와 고유어 지명 등을 알아봤다.

 

 

▲ 한자어 세교동 대신 고유어 잔다리 마을이라고 표기된 이정표.

 

■ 유래 있는 지명 많았던 오산

 

옛날 문헌 지명의 변천상을 역사·언어학적 의미에서 보는 것은 조상의 애환과 슬기로운 생활상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오산의 지명은 복잡한 양상을 띤다. 오산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의 지명들이 일제에 말살되고 민족 정서와 전통은 짓밟혔다.

 

본래 우리나라에는 평(坪), 성(城), 원(院), 대(岱), 촌(村), 포(浦), 원(圓), 산(山), 곡(谷), 누(樓), 교(橋), 창(倉), 장(庄), 곶(串) 등의 유래 있는 지명이 많았다.

 

오산도 일제 초기에는 신촌(新村), 평촌(坪村), 갈곶(葛串), 지곶(紙串), 서촌(西村), 대화촌(大花村), 어인포(魚仁浦)가 있었다. 이외 궁대(宮岱)와 두곡(斗谷)이 있었는데 1914년 수원군 성호면이 된 후 리(里)로 바뀌었다. 마을 명도 바뀌거나 없어진 경우가 많다.

 

 

 

■ 750살 된 지명 ‘오산’

 

오산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한 문헌은 1451년 개찬된 ‘고려사(高麗史) 세가권 제25’이다. 이 중 원종 1년(1260년)에 “속리대가 을유에 또 오산에 퇴둔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어 1452년에 편찬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약 750년 전부터 오산이란 지명을 써온 것으로 추정된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도 “구흥천은 물의 근원이 보개산 남쪽에서 나와 수원부 오산천원에 흘러든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외 조경남의 ‘난중잡록’과 신경의 ‘재조번방지’에서도 오산 지명의 기록이 보였다.

 

 

▲ 오산시 필봉산 일대

 

■ 오산은 고산(孤山 외로운 산)이었다?

 

오산 지명의 특징 중 하나는 한자 뜻풀이가 많다는 것이다. 오산 지역에 까마귀가 많았다 해서 붙여진 오산(烏山), 인근 서해 바닷물이 오산천으로 올라오는 큰 내(川)였는데 이 내에 큰 자라(鰲)가 많아 오산(鰲山)으로 썼다는 설도 있다. 세 번째는 오산 동쪽에 동탄면 오산(梧山)리가 있는데 경부선 철도 건설 시 역명(驛名)을 오산(烏山)으로 쓰게 됐다는 설도 전한다.

 

오(烏)자는 고대 삼국 시대부터 지명표기자로 흔히 쓰여진 글자이며 산은 ‘미’를 ‘뫼’의 변화로 보고 고쳤던 것이라는 추정이다. 오산의 고령자들은 지금도 ‘오산장(烏山場)’을 ‘오미장’이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 이에 설득력을 더 한다. 또 멀리 외딴 산(독산 禿山)이 있어 ‘외미’, ‘오미’ 또는 ‘오산’이라 불렸다는 설도 전한다.

 

언어학적으로 오(烏)자의 음(音)은 ‘오’로 ‘나라(모음 아래아 표기)’의 ‘오’ 음차(音借)이다. ‘산’은 ‘뫼’의 훈차(訓借)이다. 따라서 오산은 ‘오뫼’라고 할 수 있다. 오산의 오(烏)는 중세 국어의 ‘돌·돗·돋’과 같은 뜻이다.

 

중세 국어에서는 ‘외따로’ 혹은 ‘홀로’라는 뜻의 고(孤)로 쓰였던 점에 기인해 ‘오’는 ‘고’의 ‘ㄱ’ 탈락으로 분철됐다는 학설도 있다. 이는 오산(烏山)이 고산(孤山)에서 변화해 오산으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홀로 외따로 떨어져 있는 독산(禿山 혹은 禿城山)을 상징하면서 오산이란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 오산동 성산새싹길 이정표

 

 

■ 오산동 옛 이름 ‘천변동(川邊洞)’

 

1989년 1월 1일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오산은 수원과 화성의 일부 지역으로 오랜 기간 예속돼 왔다. 정조 13년(1789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오늘날 오산 지역은 청호면, 시봉면, 삼미면, 산성면, 초평면의 5개 면이었다.

 

정조 17년(1793년)에 간행된 ‘수원부읍지’에 나오는 지도에서 청호, 초평, 삼미, 문시, 산성, 이탄면 일부가 오늘날 오산 지역에 속했다. 순조 31년(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는 방리까지 나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문시면(文市)면-범 8동으로(구 시봉삼미양면금합우비 舊 市峰三美兩面今合于比) 오학동(嗚鶴洞), 죽담점(竹潭占), 묵암동(墨巖洞), 신촌(新村), 옹동평촌(甕洞坪村), 세교(細橋), 관음동(觀音洞)

 

* 산성(山城)면- 범 5동으로 서리(西里), 남리(南里), 지곶리(紙串里), 신촌리(新村里), 양산리(陽山里)

 

* 청호면(晴湖)면- 범 7동으로 갈곶리(葛串里), 기문동(奇門洞), 당리(棠里), 원통리(元通里), 부산동(釜山洞), 수덕동(修德洞), 천변동(川邊洞)

 

* 초평면(楚坪)면- 범 14동으로 수철리(水鐵里), 누읍리(樓邑里), 타종리(他宗里), 마유동(馬遊洞), 신촌(新村), 모전촌(牟田村), 용란리(龍蘭里), 서촌(西村), 여대리(余岱里), 내창동(內倉洞), 어은굴리(漁隱窟里), 대화촌(大花村), 궁기리(宮基里), 어인포(魚仁浦)

 

* 오매천(烏梅川)- 재부남사십리 청호면(在府南四十里 晴湖面)

 

청호면의 천변동은 오산천변의 마을로 오늘날 오산동 일대라고 추정한다. 오매천은 오늘날의 오산천이다. 문시면의 죽담점은 죽미령 근처이며 묵암동은 금암동 일대를 말한다.

 

산성면의 지곶리, 양산리 등은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초평면의 누읍리 궁기리는 궁터, 대화촌은 대호밭 일대의 명칭이다. 1914년 4월 1일 산성면의 성(城)자와 청호면의 호(湖)자를 따 성호면이 된 것은 일제의 억지 지명으로 붙여진 것이다. 1941년 10월 1일 오산의 대표 지명인 성호면에서 오산면으로 개칭됐다.

 

 

▲ 오산천

 

 

■ ‘6백년 전’ 오산천명 최초 등장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등 총 23권의 자료에 따르면 오산천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약 600년 전이다.

 

‘대동여지도’로 알려진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오산천이 토범천이라고 적혀 있다. 또한 3·8일에 열리는 오산장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260년 전이다.

 

* 1425년- 영조실록에 용인의 구흥천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구흥천은 신증도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흥천은 구흥역 남쪽에 있다. 물 근원이 보개산 남쪽에서 나와 수원부 오산 원천으로 흘러 든다”는 것으로 보아 최초의 오산천명이라고 집필진은 추정한다.

 

* 1481년- 성종(成宗)조에 노사신이 쓴 동국여지승람의 용인현 산천조 구흥천을 설명하면서 수원부 오산원천이라는 설명이 나옴.

 

* 1611년- 광해군 3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위와 동일한 오산원천 내용 나옴.

 

* 1753년- 이중환(李重煥 1690~?)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오산(鰲山)이란 지명이 나오고 오산장(場)이 3일과 8일(당시 음력)에 열린다는 기록 나옴.

 

* 1789년- 정조 13년에 간행된 수원부음지의 산천조에 오매(烏梅)천으로 기록돼 있다.

 

* 1793년- 수원부읍지에도 오매천으로 기록돼 있다.

 

* 1800~1834년- 순조 때 발간된 여지도(輿地圖)에는 오천(烏川)으로 기록 돼 있다.

 

* 1831년- 순조 31년에 간행된 화성지(華城誌)에는 오매천으로 표기됐다.

 

* 1834년- 김정호(金正浩)가 그린 청구도(靑邱圖)에는 토범(菟汎)천으로 표기됐는데 여기서 토는 예전에 오(烏)와 같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 1835년- 위의 청구도와 마찬가지로 김정호가 쓴 청구요람(靑邱要覽)에는 토현(菟峴)천으로 표기돼 있다.

 

* 1910년- 사선읍지(私選邑誌) 영인본 경기도편 산천조에 오매천(烏梅川)으로 표시돼 있으며 재부남40리청호면(在府南四十里 晴湖面)이라 나온다.

 

 

▲ 초평동 황새로 이정표

 

■ ‘은여울, 밀머리, 황새…’ 예쁜 고유어 지명

 

오산시에는 예쁜 고유어 지명들이 있다. 은여울로(銀溪洞 은계동), 밀머리로(운암뜰), 황새로(초평동), 절골길(원동 삼보사 부근), 잔다리마을 등. 요즘 들어 생긴 성산 새싹길(오산동)까지. 정겨운 고유어 지명의 유래를 간략히 설명한다. 아울러 대부분 구전되는 내용을 채록한 것이므로 기록 확인은 불가함을 밝혀 둔다.

 

* 바닷물 밀려 들었던 밀머리 - 밀머리는 바닷물이 밀려왔다 해서 이름지어 졌다. 화성경찰서 부근 일대는 과수원자리였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밀려왔다.

 

오산천이 범람했다는 설도 있다. 1920~’30년대에는 오산천의 제방이 탄탄하지 않아 자주 넘쳤다는 것이다. 현재 사용하는 운암뜰(시청, 운암단지, 시민회관 일대 약 30만 평)이라는 명칭에서 ‘뜰’은 ‘들’을 의미한다.

 

이곳은 조선시대 벼 생산지였다. 일제 강점기에 경부선을 놓으면서 오산천의 흐름을 바꿨다. 당시 오산동에 인구가 많았으므로 그곳에 역사를 짓고 철도가 오산천를 피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화성시 동탄에서 청호동 구간의 오산천 줄기가 급선회하는 원인이다.

 

 

▲ 오산천 황새포에는 황새가 많았다.

 

* 갈매기와 배가 드나들었던 황새포(-浦) - 황새포는 맑음터공원 인근 탑동대교 밑이다. 이 곳은 오산천과 지류 가장천이 합류해 물살이 세고 소용돌이가 생긴다. 이것은 물고기의 서식 여건이 되는데 이러한 이유로 황새가 많았다.

 

또한 소금이나 쌀을 나르던 평저선(바닥이 뗏목처럼 평평한 배)이 드나들었다. 평택호 부근 바다를 통해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오산천은 멱을 감을 정도로 맑았고 수심 1m를 웃돌 만큼 물이 풍부했다. 이는 배가 드나들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10여년 전 갈매기를 봤다는 목격담도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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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견(총 2 개)
  • 박성우2016-09-26 20:43:29

    많은 도움이 됐어요.😆👌👍🏻😇

  • 이화성2012-08-31 21:12:08

    평택에도 세교동이 있고요,옛이름이'잔다리'였는데요,오산에도 동명의 세교동과 잔다리가 있네요.오산역에있는 오산(烏山)의 유래는 일본인이 경부선을 만들때 까마귀가 많이와 오산(烏山)으로 불렀다고 써있네요..이영주 기자님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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