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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평생 가난한 손으로 살다 - 빈민운동 대부, 제정구가 꿈꿨던 이상과 가치
  • 기사등록 2012-11-10 17: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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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조윤장 편집국장 = 말 한 마디로 똑 부러지게 정의하기 어렵지만, 사전적 의미로 정치(政治)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국가의 권력을 획득·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토록 하고 상호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로 풀이하고 있다.

 

12월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이 D-39(11월10일 현재)로 카운트다운을 앞두고 있다.

 

그렇게 말 많던 야권 단일화 문제가 이윽고 ‘문재인(민주통합당) vs 안철수(무소속)’후보 캠프에서 협상을 수용했다.

 

각자 유리한 조건에서 자웅(雌雄)을 가리겠다는 속셈이 과연 어떻게 판가름 날까 정말 궁금하다.

 

만일 단일화가 성사된다면 대통령 선거는 집권당 박근혜(새누리당) 후보와 맞대결로 펼쳐지는 진검승부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수 년 간 암흑터널에 갇힌 채 허우적대는 작금의 경제위기가 고단한 국민들을 벼랑으로 내몰면서 정치와 정치가는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벌써 영면(永眠)에 든 1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가난한 손에 도시빈민의 아버지로 불렸던 제정구(諸廷垢·1944년3월1일~1999년2월9일).

 

향년 54세에 생을 마감한 그는 정치가였지만 빈민· 사회운동가로 사람들은 더 많이 기억할 것이다.

 

그가 타계하자 당시 여· 야 정치인들은 “3김 파벌정치가 제정구를 죽게 만들었다”고 애석해 했다.

 

경남 고성 출신으로 판자촌에서 빈민·노동운동을 이끌며 고단한 빈민층 권익신장과 힘없는 사람들 편에서 앞장섰다.

 

제정구는 1970년대 중반 판자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했고, 시흥시에 집단거주촌을 만들어 오갈데 없는 철거민들을 이주시켰다.

 

1976년 서울 양평동 철거 당시에 조성한 ‘복음자리마을’은 1980년대를 통틀어 철거에 직면한 이른바 달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빈민운동의 상징이 됐다.

 

1980년대 중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달동네 지역에 철거바람이 불어 닥쳤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 손님들이 보기에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당시 정부는 국제스포츠의 성공적 개최라는 미명하에 갈 곳 없는 도시빈민들의 딱한 사정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에 달동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철거반대운동을 펼쳤고, 그 중심에 제정구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빈민운동의 대부’라고 불렀다.

 

아직 쪽방촌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제 서울의 달동네는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절박한 투쟁으로 맞선 철거민들도 지금은 별로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빈곤문제가 해결된 건 결코 아니다.

 

빈곤은 쪽방촌에 지하월셋방과 비빌하우스촌으로 숨어 들었다.

 

오히려 최근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신빈곤층’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 졌다.

 

빈민운동의 대부 제정구(서울대 정치학)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6년 연거푸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1998년 폐암 진단을 받고 입원할 때 까지 ‘복음자리마을’에서 도시빈민들과 동고동락했다.

 

1986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그에게 가난과 빈민은 무언가를 베풀고 도와야 하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었다.

 

도시빈민들의 삶 속에서 ‘공동체 이상’을 찾았기 때문이다.

 

부자, 가난한 사람, 배운자, 그렇지 못한 사람도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

 

제정구가 꿈꾸고 지향하는 사회였다.

 

길지 않았던 그의 삶은 빈곤문제에 대처하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가 가난을 함께 나눠야 한다고..

 

19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교사로 활약한 그는 격변기 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받는 등 2차례 실형선고와 함께 투옥됐다.

 

재학시절 민주화운동으로 수배·구속·투옥에 이어 제적과 복학이 반복되면서 1980년 늦깍이로 졸업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1987년 6·10 항쟁을 주도하며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단일화에 앞장섰다.

 

1987년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다.

 

최대 관심사는 역시 야권 후보 단일화였다.

 

김영삼(통일민주당) 후보 vs 김대중(평화민주당) 후보.

 

이들은 박정희 정권에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쌍두마차다.

 

야권후보 단일화는 절대적 과제였고, 양 김 후보는 단일화를 장담했다.

 

하지만 단일화는 무산됐다.

 

단일화를 거부하고 각자 출마한 양 김 후보는 노태우(민주정의당) 후보에게 완패했다.

 

그들은 상대가 양보하길 바랐을 뿐, 자신은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정구는 “우리나라의 정치개혁을 위해 양 김과 3김으로 상징되는 정치세력이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3김씨 파벌정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다.

 

“장렬히 전사할망정 양 김씨에 줄 서지 않겠다”고 비판했다.

 

그의 사후에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1999년10월20일 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이 창립되고 그 뒤 제정구 기념사업회로 발족됐다.

 

2011년 2월25일 서울고법은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반국가단체(민청학련)를 조직, 내란을 준비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제정구 전 국회의원 재심(再審)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가난한 손으로 평생을 살았다.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소문을 듣고 궁핍한 그의 생활을 엿 볼 요량으로 집에 갔는데 화장실이 너무 허름해 용변을 참고 그냥 갔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정치와 정치가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비록 짧은 생을 마쳤지만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고뇌하고 실천했던 그의 청빈한 삶, 그의 꼿꼿한 정신에서 이 시대를 성찰해 보고 싶다.

 

저서로 신부와 벽돌공(1997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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