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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에 전하는 신비한 옛 이야기들(4) - 이영주 기자, 구비전승 일곱째 ‘서랑의 전설’
  • 기사등록 2013-04-08 15: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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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전쟁에서 여인들이 당하는 수난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인조가 삼전도(서울 송파구 삼전동 소재 한강상류의 나루)에서 청태종(이세민·재위 626-649) 앞에서  ‘3배 9고두(상복을 입고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박아 그 소리가 단 위에 앉은 청태종에게 들리게 하는 것)’로 항복의 예를 갖춘 병자호란 당시.

 

오산시 벌음동에서 정절을 지킨 처녀  ‘서랑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거하다 마침내 항복했다.

 

■ 서랑의 전설

 

벌음동은 예부터 이천(利川) 서(徐)씨가 집성을 이루며 살고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 일이다.

 

여진족 후금(後金)의 군대가 조선을 침범해 우리 군사는 남으로 밀렸고 마침내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됐다.

 

여기서 후금군에게 수십 일 항거했지만 결국 임금은 항복해야만 했던 당시 이야기다.

 

벌음동 마을로 여진족들이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고 부녀자들에게 행패를 부리며 살생을 저질렀다.

 

이 때 벌음동에 살고 있던 서희장군 후손 서봉학이 부원수로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 서봉학의 슬하에는 두 아들과 10대 후반의 아리따운  ‘서랑’이란 처녀가 있었다.

 

두 아들도 싸우기 위해 출전했고 집안에는 부인과 딸 서랑만이 있었기에 두 모녀가 서 장군의 시신을 묻을 수 밖에 없었다.

 

서랑은 인근에 인물 좋고 예의 바른 낭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진족은 마을을 뒤지며 부녀자들을 찾아 헤매다 서봉학의 집 앞에서 서 낭자를 발견했다.

 

미모의 서 낭자를 발견한 그들은 서랑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도무지 틈을 보이지 않자 강제로 서랑의 몸을 끌어안고는 가슴 부위를 더듬었다.

 

서랑의 완강한 반항과 그녀의 아버지 서 장군의 위용에 눌려 여진족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 후 서랑은 집으로 들어와 능욕 당함을 분하게 여겨 여진족의 손이 닿은 부분을 물로 씻고 또 씻었으나 영원히 그 더러움을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해 자신의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 가슴을 도려내고 자살했다.

 

처녀의 몸으로 충절을 지킨 서랑의 시신을 접한 서 씨 문중에서는 그녀의 높은 뜻을 기려 마을 서북쪽 장천골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묘를 썼다.

 

안타깝지만 서랑에게 열녀문이 내려졌다는 기록이나 전설은 없다.

 

그의 부친 서 장군이 패장이었고 전란중 이 땅의 수많은 여인들이 여진족에게 짓밟혀 서랑의 이야기가 흔한 사연으로 여겨졌을지 모를 일이다.

 

서랑의 묘는 지금도 마을을 바라보는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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