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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조윤장 기자 = 플라톤은  ‘전쟁의 끝은 죽은자 에게만 있다.(only the dead have seen the end of war.)’고 말했다.

 

인류 역사와 공존하면서 인간의 삶과 영혼까지 처참하게 피폐시키는 전쟁은 괴물이다.     

 

이에 오산인터넷뉴스는 6·25 한국전쟁 발발 63년, 정전 60년을 맞아 전쟁의 실상과 나아가 육성증언을 통해 오산지역에서 자행된  ‘보도연맹 사건’을 조명한다. - 편집자 주 -  

 

◆6·25 한국전쟁      

 

우리 한민족에게 또한 전쟁은 반만년 역사에서 끊임없는 외세침입으로 점철된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지구촌 유일한 분단국가, 대한민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소련군 출신 북한 김일성이 중화기로 무장한 인민군을 앞세워 1950년 6월25일 새벽 남북군사분계선(38선)을 넘어 기습남침 감행으로 발발한 6·25 한국전쟁.

 

전쟁은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과 함께 이 땅을 남과 북으로 갈라 놓았다.

 

▲ 6·25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사상과 체제가 다른 남과 북으로 갈라 놓았다.

 

전투중에 진행된 휴전회담에서 미국은 한·미 상호안전보장조약체결·경제원조·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을 무마시키고, 1953년 7월27일 UN군과 인민군이 정전협정(전문 5조36항)을 조인한 것이다.

 

전쟁발발 3년1개월, 회담개시 2년1개월만이다.

 

한국전쟁은 남·북 쌍방에 엄청난 인명피해(사망 150만명·부상 360만명)는 물론 국토의 황폐화를 초래했다.

 

특히 오산은 UN군이 첫 전투에 참여한 곳으로 기록된다.

 

UN은 16개 나라로 이뤄진 연합군을 한국으로 파병했다.

 

북한군과 맞선 UN군이 죽미령에서 초전(初戰)을 치렀다.

 

당시 일본 큐슈에 주둔한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특수부대(406명)가 7월3일 새벽 3시 죽미령에 도착, 국군과 합류한 뒤 아침 7시30분 부터 북한군과 치렬하게 전투를 벌였다.

 

▲ 스미스 특수부대원이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M-20 로켓런쳐(3.5인치

 바추카포)를 겨냥하고 있다.

 

스미스 특수부대는 북한군이 장착한 소련제 탱크를 4대나 박살내며 6시간15분 동안 싸웠지만 상당수가 장렬히 산화했다.

 

죽미령에 세워진 ‘UN군 초전 기념비’는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 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있다

 

2013년은 정전 60주년을 맞는다.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쟁이란 급박한 상황에서 반공을 국시로 내건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와 군·경이 과거 좌익계 인사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살해한 사건이다.

 

이는 정부와 군·경이 전쟁 초기 과거 좌익에 관계된 인사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을 추정하거나 우려한 것으로 보도연맹 소속원들이 살해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상적 문제와 무관했던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양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참혹한 난리통에 군인도 아닌 무고한 그들이 대한민국 정부와 경찰에게 학살된 아이러니한 참극이다.

 

이른바  ‘보도연맹(輔導聯盟)’ 사건이다.

 

보도연맹은 좌익전향자들을 중심으로 1949년 조직된 반공교화단체로 좌익세력의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했다.

 

정식명칭 ‘국민보도연맹’은 일제강점기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체제를 모방한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게 무차별 검속(檢束)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평택 이남 대부분 지역에서 발생했으며, 전쟁중에 벌어진 최초의 집단적 민간인 학살이다.

 

이는 또한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발생했던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주요 원인이 됐다.

 

1950년 7월21일 경북 문경군 호계면 별암리 야산에서 2백명, 영순면 포내마을 뒷산에서 3백명, 김천시 구성면에서 300명 등 김천지역 1청명(추산) 등 전국 각 지방별로 부지기수다.

 

이들 가운데 좌익 경력이 없으면서 친구나 주위의 권유로 보도연맹 입맹 원서에 단순 서명만으로 끌려가 희생된 양민들이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산지역 보도연맹 사건

 

※육성증언-이기호(82)·이정일(74)·이정묵(67)

 

▲ 왼쪽부터 이기호씨, 이정일씨, 이정묵씨

 

전국에서 자행된 보도연맹 사건은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수차에 걸쳐 보도됐으나, 오산지역은 지금껏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전쟁통에 보도연맹이란 미명으로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을 잃은 가족들은 강산이 6번이나 바뀐 지금도 시간이 멈춰 있다.

 

오산시 누읍동·가수동·금암동 등 3개 자연부락 40가구는 매년 음력 5월17일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부모 형제 제삿날이다.

 

예컨대 ‘떼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들은 도통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군·경에 끌려가 무참히 학살된 것이다.

 

인민군 부역에 나섰다는 이유로, 이장집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았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들은 대개 농사만 짓는 청·장년들로 보도연맹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 이기호씨.

 

▶이기호씨(82)는 난리통에 보도연맹으로 몰린 20대 중반의 형을 잃었다.

 

“누가 집에 찾아 와 비료를 나눠 준다고 해서 도장을 찍어 줬는데, 곧바로 형이 끌려갔고 며칠 뒤 수소문 끝에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시신을 수습해 마차로 실어 왔습니다”

 

▲ 이정일씨

 

▶이정일씨(74)는 서른다섯살 아버지와 마을 구장(이장)을 봤던 큰아버지를 각각 여의었다.

 

여나무살 안쪽 나이였지만 이정일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 온 아버지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 이정묵씨

 

▶이정묵씨(67)는 겨우 스물아홉 밖에 안된 아버지와 생이별했다.

 

너댓살 적 일이라 당시 기억은 별로 없지만,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는 지금까지도 크나 큰 설움이자 슬픔으로 삶을 짓누르고 있다.

 

그나마 다행히 이들의 시신이 수습될 수 있었던 건 집단학살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 온 이기호씨 6촌 형(당시 20대 후반)이 마을에 알렸기 때문이다.

 

이미 근동에서 잡혀 온 수십 수백명이 수원시 모처에서 집단으로 총살됐는데, 시신속에 가렸던 6촌 형이 확인사살 과정에서 총검에 찔렸지만 죽은 채로 은신하면서 화를 면한 것이다.

 

6촌 형은 이 사실을 마을에 알린 뒤 무슨 이유인지 그로부터 행방이 묘연해 졌다.

 

2005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공포되고, 반민주적·반인권적 공권력 행사 등으로 은폐된 진실을 밝히기 위한 독립적 국가기관 진실화해위원회(眞實和解委員會)가 활동했으나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다.

 

이정묵씨(前 오산시의원)는 “6·25 한국전쟁 당시 전국 각지에서 자행된 보도연맹 사건은 무고한 민간인까지 제물로 삼았고, 오산지역 3개 자연부락에서 양민 40명이 희생됐고 매년 음력 5월17일 같은 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며“그동안 과거 정부에서 보도연맹 사건을 조사하고 진실규명 등에 나섰지만, 유독 오산지역은 언급조차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라도 무고하게 희생된 부모 형제 등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정확한 사실조사와 합당한 조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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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3-06-25 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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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견(총 2 개)
  • 오산인터넷뉴스2013-06-26 13:24:15

    무기 네티즌님, 지적 고맙습니다. - 오산인터넷뉴스 -

  • 무기2013-06-26 08:59:58

    스미스 부대원이 겨누고  있는것은 박격포가 아니라 M-20 로켓런쳐라는 일명 3.5인치 바추카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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