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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으로 일군 인내·집념의 고행 - 이영주 기자,휴전선따라 천리길'국토횡단'보고
  • 기사등록 2013-08-08 17: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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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새벽 4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데나 눕거나 앉지 않는다. 어디 가서 화장실 먼저 찾지 않는다!”

 

이혁희 대장이 12박13일에 걸친 일정을 갈무리하기 무섭게 대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에 쓴 모자를 하늘로 던져 올렸다.

 

▲ 2013년 8월8일 파주시 임진각에서 '통일맞이 국토대장정' 해단식이 열리고 있다.

 

땀에 절은 검은색 모자들은 창공에서 점점이 수를 놓고 내려 앉았다.

 

폭염속을 누볐던 국토대장정은 그렇게 마무리 됐다.

 

▲ 대원들이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을지전망대에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현실을 몸소 체험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지구촌에 호소하는 천리길 국토대장정이었다.

 

(사)통일맞이가 7월27일~8월8일까지 12박13일 일정으로 기획했다.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를 출발,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까지 총 400km에 이르는 국토를 횡단하면서 평화통일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이었다.

 

국토대장정에 참여한 인원은 50여명으로 초등학생에서 60대 어르신, 재일동포, 외국인까지 세대와 국적을 아우르는 다양한 대원들로 구성됐다.

 

전쟁으로 분단된 휴전선과 민간인통제구역을 주로 걷는 일정속에서 수십명 대원 일거수일투족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대원들은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짐을 챙기고 다음 목표지를 향해 걸었다.

 

▲ 대장정은 강원도 고성에서 경기도 파주 임진각까지 400km 여정이었다.

 

유난히 지독한 불볕날씨에 하루 평균 30km를 이동해야 하므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동트기 전에 움직여야했다.

 

새벽 4시30분이면 집합이 완료된다.

 

30분간 씻고 단복을 착용한 뒤 각자 자신의 짐을 빠짐없이 챙기고 모이는 것이다.

 

이어 간단한 스트레칭과 그 날의 목적지나 과정 설명이 끝나면 바로 걷기 시작한다.

 

미처 마르지 않은 옷을 입는 찜찜함도 점차 익숙해 졌다.

 

초반 2~3일은 단복을 손으로 짜서 널었기에 빨래가 온전히 마르지 않았다.

 

그참에  이른바  ‘짤순이’ 탈수기가 등장했다.

 

남성 스텝진은 짤순이를 한 손에 들고 2~3층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대원들의 빨래를 거들었다.

 

그럼에도 굳은 날씨와 바쁜 일정 탓에 빨래는 제대로 마르지 않았다.

 

▲ 어느 마을회관 숙소에서 여성 대원들이 빨래를 널어 놓고 꿀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느 대원은  “출발한 날 빤 양말이 아직까지 마르지 않았다. 아예 축축하면 말리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더 지나면 될 것 같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널고 있다”고 푸념했다.

 

그 말을 들은 대원들은 모두 웃었다.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새벽.

 

해는 뜨지 않았다.

 

어두운 사방을 헤치고 걷는 일행들은 말이 없었다.

 

▲ 대장정 팀은 진부령, 해산령, 말고개 등 고개를 넘고 또 넘으며 행군을 이어갔다.

 

아직 누구도 지나가지 않은 듯 적막하고 고요한 길을 걷는 그 순간은 진정 혼자만의 자신과 만나는 시간 같았다.

 

그렇게 10km를 걷고 난 다음에야 아침을 먹는다.

 

식사는 밥차가 해결해 줬다.

 

▲ 대원들이 밥차에 줄서서 배식을 받고 있다.  

 

밥차는 대장정 모든 일정에 동행하는데 먼저 목적지에 도착해서 식사를 준비한다.

 

선잠과 피곤에 지친 몸을 재촉해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걷는다.

 

또 10km를 걷고 점심, 저녁까지 방식은 같다.

 

중간중간 이온음료와 열량이 높은 간식으로 체력을 보충한다.

 

과일이나 사탕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강원도 어느 고개를 넘어 가는데 앞에서 전달되는 구호가  ‘사탕!’이었다.

 

보통  ‘정지→ 대기→출발→바닥→우로밀착’ 등의 구호지만  ‘사탕은 뭔가’하며 의아해 했다.

 

몇 미터 앞에 가보니 답이 나왔다.

 

길가 한 켠 연석위에 포도맛 사탕과 카랴멜이 한 개씩 띄엄띄엄 놓여져 있었다.

 

스텝진이 연출한 귀여운 간식 이벤트였다.

 

많이 걷는 날은 40km를 훌쩍 넘는다.

 

참가에 앞서   ‘당이 떨어져서 손 떨며 밥을 먹을 수 있겠다’는 우려는 다행히 기우였다.

 

정말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으면 쉬는시간을 줬고, 속이 좀 허하다 싶으면 간식이 나타났다.

 

물론 걷고 또 걷는 강행군은 정말 힘들다.

 

그것도 하루에 10시간이 넘는 걷기는 고도의 인내심와 집중력이 요구되는 강한 의지가 절실했다.

 

“여러분들이 걷다 보면  ‘아, 내 무릎 연골이 닳았나?’하는 생각도 들겁니다. 예, 맞습니다. 연골 나간 거 맞는데요, 그래도 죽지 않으니까 그냥 걸으세요(웃음).”

 

대장정을 성공리에 이끈 철인 이혁희 대장이 사전교육에서 주지한 말이다.

 

이 외에  ‘물집이나 다리 통증은 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 등 정신교육이 강조됐다.

 

그만큼 고통스럽고 빠듯한 일정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대원들 연령대는 초등학교 6학년생(13살)에서 63세 어르신까지 매우 다양했다.

 

중·고·대학생이 주를 이뤘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성인부도 적지않은 비중이었다.

 

이들은 저마다 이유를 가지고 대장정에 참가했다.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 한국인 친구를 사귀기 위해, 조국의 땅을 밟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등등.

 

12박13일의 일정 내내 누구 하나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초·중·고 학생들이 밥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 비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집 떠나 밖에서 먹고 자기에 불편하고 힘들 법도 한데  “집에서 먹는 밥보다 더 맛있다”고 하니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했다.

 

세대를 뛰어 넘어 이해의 시간은 절실하다.

 

어느 시대나 그러했듯 기성세대가 젊은(혹은 어린) 세대를 바라보는 걱정은 어쩌면 기우일지 모른다.

 

기성세대가 예전에 그랬듯이 현재 젊은세대들 또한 나름의 규칙과 자기관을 갖고 있었다.

 

아주 확고하고 분명하며 반듯했다.

 

하루 일정을 소화한 대원들은 보통 오후 6~7시쯤 숙소에 도착했다.

 

짐은 탑차에 실려 따로 운반됐다.

 

▲ 대원들이 을지전망대에서 강행군으로 피로에 지친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다.

 

숙소에 도착하면 각자 방을 배정 받고, 차에서 짐을 내린 뒤 씻고 저녁을 먹는다.

 

다음으로 저녁 프로그램이 준비된다.

 

초반은 각 조 구호, 마니또 선정, 자신에게 편지쓰기 등 친목위주였고 후반부는 세대별 모임, 강연, 초청인사, 조별 평가토론회가 이뤄졌다.

 

이런 프로그램은 매일 치러졌다.

 

다음날 일정이 4시에 시작되는 만큼 대원들 평균 수면시간은 4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걷기에 몸이 익숙해지면서 새벽 3시45분에 일어나기도 했다.

 

대장정 실무를 담당하는 스텝진들은 더욱 분주했다.

 

이들은 매일 회의를 진행해 갔으며, 대장정단이 움직이는 일거수 일투족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정리했다.

 

숙소는 마을회관, 초·중학교, 수련원 등지였다.

 

요즘은 여름이라도 따뜻한 물로 씻는 경우가 많은데 대장정 기간에 온수가 나오는 숙소는 고작 3번이 전부였다.

 

아무래도 공공기관이니 여러가지 이유로 찬물이었다.

 

하루종일 더위에 익은(?) 몸에 차디찬 물을 끼얹는 순간도 나름 용기가 필요했다.

 

찬물이 담긴 바가지를 들고 무섭다며 덜덜 떨던 대원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성대원들은 여성대원들에게 샤워시설과 조금 더 쾌적한 잠자리를 양보했다.

 

여성대원들이 화장실 등을 전전하며 씻을때 남성대원들은 수돗가에 천막을 치고 해결했다.

 

사실 고백하면 이 부분은 실제로 목격하진 못했고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다.

 

한번은 민통선 안쪽 어느 마을회관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여성대원은 1층, 남성대원은 2층이었다.

 

다음날 전달할 내용이 있어 2층 남성숙소를 갔는데 대리석 바닥에 은박지를 깔아 침낭을 덮고 노숙한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들의 신사도에 감탄했다.

 

나중에 친해진 어느 남성대원은  “이건(숙소, 씻는 장소·순서 등) 역차별이다”라며 장난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강원도 화천군 해산령을 넘을 때였다.

 

해산령 정상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초 출발시 대원들의 걸음 속도는 시속 4km 정도였다.

 

속도는 점점 빨라져 나중에 6~7km까지 속력을 내기도 했다.

 

그날도 속도가 빨라진 같은조 대원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정상 부근 몇 개의 벤치에 앉아 가볍게 정담을 나눴다.

 

배식이 시작될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몇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는 갑자기 폭우로 변해 억수같았다.

 

스텝진들은 우천을 관망하다 대원들에게 우의를 나눠줬고, 남성대원들과 천막을 치고 식사할 자리를 마련했다.

 

그날 대원들은 우의를 챙겨 입고 빗소리를 음악삼아 선채로 밥을 먹었다.

 

땅바닥에 앉아 밥을 먹는 경우도 허다했다.

 

처음엔 쭈뼛쭈뼛 앉지도 서지도 못했으나 나중엔 틈만 나거나 엉덩이 하나만 부지할 공간만 눈에 띄어도 일단 철퍼덕 앉고 보는 대원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철원평야를 지날 때도 비가 반겨줬다.

 

이번은 천둥과 번개까지 가세해 대원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가히 토네이도를 연상케하는 날씨에 추위까지 겹쳐 우리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방해했다.

 

대원들은 길가 창고 옆에서 황제펭귄처럼 모여 서로의 체온으로 기대고 있었다.

 

▲ 대원들은 비가 오면 우의를 입고 빗속을 뚫고 걸었다.

 

우의를 입기는 했으나 짧은기간에 워낙 여러 차례 비를 맞았던 터라(물론 충분히 말릴 시간과 일정도 없었다) 몸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다행히 군부대 차량 지원으로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태어나서 군(軍)이 그렇게 믿음직해 보였던 건 처음이었다.

 

그날 모든 대원들에게 감기약이 지급됐고 의무복용 명령이 떨어졌다.

 

젖은 신발.

 

깔창을 빼고 신문지를 구겨 넣어 긴급조치를 했다.

 

다음날 대충 마른 신발에 감탄할 즈음 다시 비가 쏟아졌다.

 

이쯤되자 대원들은 마른신발 신기를 포기했다.

 

점심 먹을 때 10~20분 햇볕에 널었다 다시 신었다.

 

이번 대장정은 휴전선을 따라 국토를 횡단하며 통일의미를 되새기고 평화를 호소하는 취지에서 치러졌다.

 

전쟁의 폐해가 잔재한 곳들을 걸으며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저녁때 대원들의 숙소는 전시속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집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 하나 발에 밴드며 반창고를 붙이지 않은 대원들이 없을 정도였다.

 

씻고 나면 너도나도 물집 터트리고 보수(?)하느라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오고 의료를 맡은 스텝진은 구급상자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 다녔다.

 

이정도면 가히 야전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 대장정 중 터널 통과를 하고 있는 대원들.

 

물집은 아프다.

 

하루 평균 30km를 걷는 일정에 이 아픔을 해결하는 방법은  ‘인내’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물집의 고통도 그냥 계속 걷다보면 잊힌다는 진리(?)를 스스로 터득했다.

 

그러한 이유로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쉰 다음 다시 출발할 때였다.

 

걸을 때는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뒤처지면 안되니 긴장하지만 쉴때는 긴장을 잠시 놓기 때문에 다시 그 고통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햇볕도 강렬했다.

 

비와의 사투가 끝나자 이제는 작렬하는 태양이 복병으로 나타났다.

 

오전 11시쯤부터 달궈지기 시작한 태양은 점심시간을 전후로 최고조로 열기를 발산했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까지 더해 아래위로 뜨거운 오븐속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거기다 새벽에 일어나 걷는 강행군이니 대원들은 걸으면서 간혹 졸기도 했다.

 

갈증도 큰 적이었다.

 

▲ 생명수 지급. 물은 작은 휴대용 물병에 옮겨 담아 마셨다.

 

물은 한 번에 벌컥벌컥 마실 수 없었다.

 

한 번 가글을 하듯 입을 헹궈낸 뒤 조금씩 음미하며 씹어 먹어야 했다.

 

탈수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탈수가 일어나 몸이 더 힘들어진다.

 

물은 충분히 지급됐으나 평소처럼 한 번에 한 컵의 물을 다 마신다든지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이쯤되면 손으로 쏠리는 피를 다시 원활히 흐르게 하는 손체조 선생님이 나타났고 대원들을 이끌었다.

 

멀리서 보면 유치원생들이 펼치는 율동같지만, 이 운동은 효과가 좋아 조금만 흔들어 주면 부운 손이 편해진다.

 

음악을 들려주는 스텝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

 

그 대원은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커다란 음악소리도 아랑곳 않으며 지치고 힘들어 하는 나머지 대원들을 응원했다.

 

대열 선두와 후미는 교통을 책임졌다.

 

국도나 고속도로를 걸을 때 안전이 문제가 되므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통제 해야 했다.

 

‘무엇을 위해 걷는가’.

 

최대의 화두였다.

 

부모님이 강제로 보내서 온 대원,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걷는 대원도 있었다.

 

대원들은 육체적으로 힘들었을지언정 걸음은 늦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가속을 받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혁희 대장에 따르면 군부대에서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어떻게 벌써 거기까지 갔느냐. (대원들이)왜 그렇게 빨리 걷느냐”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특성상 행군을 자주하는 군대이다 보니 그들만의 속도 계산법이 있을 터인데 그보다 훨씬 빠르게 걸었다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들이 보았던 대장정단 모습은 어떤 것인지.

 

단복을 갖춰 입고 씩씩하게 걸으며 젊음의 패기와 열정을 뿜어 내던 장면인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이면에 숨겨진 그들의 꼼꼼하고 철저한 계획과 준비, 노력을 봐줬으면 한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는 무임승차가 아닌 메뉴선정에서 준비, 설거지까지 모두 스스로 해결하는 고난의 길 대장정이다.

 

단기로 참가했던 어떤 대원은  “도대체 왜(이렇게 덥고 힘든데 걸어요..)?”라는 물음을 남겼다.

 

누구도 선뜻 그 물음에 쉽사리 답하지 않았다.

 

대원들이 걷는 이유는 한걸음 한걸음 마다에 고스란히 묻혀 있다.

 

땀과 몇번씩 다짐했을 노력에 그 이유가 있다.

 

대원들은 묵묵히 400km를 걸었다.

 

말 그대로 천리길이다.

 

▲ 7월2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발대식을 가진 대장정팀.

 

어느 대원의 블로그에 게재된 내용을 소개한다.

 

‘늘 도전하고 또 도전하세요.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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