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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오산은 우리 전통예술의 총본산 - 오산사람 모두가 자긍심 되찾아야
  • 기사등록 2015-07-21 12: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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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동 인근에는 아직도 서낭나무가 있어 사람들이 찾아온다 

 

【오산인터넷뉴스】하주성 기자 = 폐청 당시 4만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재인청은 상당히 체계적인 집단이었다. 예를 들어 대방에게 납부하는 예폐(禮幣)는 전례에 의해 선생의 자제는 3냥을 바치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6냥을 바치도록 하였다. 또한 대방이 청사에 있을 때나 상관과 같이 있으면서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하면 태() 50대를 치고 재인청에서 영원히 축출했다.

 

또한 상관과 같이 있으면서 상관이 출입할 적에 일어나지 않으면 각기 구분하여 태 22대를 친다고 하였다. 이렇게 엄격하게 정해진 규범에 의하여 운영이 되던 재인청에서 대방을 선출할 때는 세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고, 그 밑에 재인들이 권점(圈點)’이라는 점을 찍어 가장 많은 점을 받은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런 점으로 관찰할 때 경기재인청의 위상을 짐작할 수가 있다. 당시 재인청에서는 대방은 규범을 위반하는 자를 처벌할 수 있었으며, 군의 수장인 청수도 가벼운 죄를 범한 계원들을 처분한 후, 후에 대방에게 보고하는 형태를 취했다고 한다. 만일 청수들이 관리하기가 어려운 중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대방에게 허가를 얻어 호송을 하여 처벌을 받게 했다.

 

제재의 방법으로는 타이름과 결태, 벌금 등과 부녀자의 간음이나 상중(喪中)에 무사(巫事) , 오륜에 벗어난 행동을 한 사람들을, 그 마을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손도(損徒)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엄격한 규범으로 관리하던 재인청

 

재인청의 규범은 제재를 가하는 것만이 아니고 길흉을 맞았을 경우에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예능이 뛰어난 자에게는 좌산목상재인(左山木上才人)이나 우산목상재인(右山木上才人) 과 같은 영광스런 명칭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효자에게는 개인이나 공동으로 상금을 주었고 관에 보고하여 표창을 받게 하기도 하였다.

 

<조선무속의 연구>에는 도광(道光)원년(1821)에 당시의 대방으로 추정되는 한요손 외 8인의 연기(連記)로 당시 한촌에 거주하던 이종만의 증조부인 이계명의 표창방을 관에 출원한 무단의 문서를 부산리에 거주하던 이종하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근언(右謹言), 어탄면 송라리에 살고 있는 이계명은 저희들과 동류인 하천(下賤)입니다. 평소에 출천지행(出天之行)으로 그 부모를 섬겨 왔습니다. 밤에는 부모의 이부자리를 살펴드리고 아침에는 안부를 물으며, 온정으로 그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인근 마을과 향당에서 그를 효자라고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비가 병들어 두렁허리를 먹고 싶어 하였으나, 그때는 크게 가뭄이 들어 내가 말랐으므로 낚시질로 고기를 잡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30여 마리를 잡으니 천상(天祥)이 효심이 지극하여 2마리의 잉어를 낚았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또한 명이 경각에 달리자 손가락을 갈라 피를 흘려 넣어 며칠 동안 목숨을 연명토록 하니, 이 또한 효성이 지극한 탓이옵니다.

 

3년 상을 지나면서 곡을 폐하지 않고 악기를 잡지 않았으며, 3년간 아내와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천고에 드문 사람이므로 본 동네에서 관영에 보고 드립니다. 저희들은 미천한 중에도 탁월한 행적을 파묻힐 수 없으므로 저희들 스스로 아뢰는 바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 서낭목 옆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 전하는 말에는 정월이면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오산은 예능의 고장이라는 자부심 가져야

 

이렇게 철저한 학습이념과, 천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해 있었지만 스스로 자신들을 내세울 줄 알았던 재인청이다. 재인청은 조선조 말에 130년간이나 이 지역의 문화예술을 총괄하던 단체였다.

 

이러한 재인청이 오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오산은 에능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오산에 이용우 가문에서 보관하던 있던 이 재인청의 창제도청안 등은 이용우 세상이 타계 후 불태워졌다고 전한다. 소중한 문화유산인 우리 예술사가 한 줌 재로 변한 것이다.

 

만일 아끼바 다카시의 <조선무속의 연구>라는 책이 없었다면 오산 부산동은 그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시골의 마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당시의 상황을 기록해 놓은 책으로 인해 오산 부산동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4만 여명의 회원을 갖고 있으면서 체계적인 조직과 엄격한 학습을 자랑하고 있던 재인청. 오산 부산동을 재인마을로 지정하고, 오산시에 재인청예술단 하나쯤 신설해야 하지 않을까? 한 때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의 중심지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의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큰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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