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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오색시장 이야기(1) 장시의 역사 - 우리나라 장시는 언제 시작했을까?
  • 기사등록 2015-07-22 15: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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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기획취재팀 = 전통시장은 조선 시대의 상업 형태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 이전 고려시대에도 장의 기능이 있었다. 다만 서울의 시전과 난전을 비롯해, 중기 이후 각 지방에 개설된 장시로 인해 전통시장이 조선조에 시작이 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전통시장은 장에 서는 상설 점포 외에도 보상과 부상 등의 행상과, 후기에 등장한 도고와 명, , 일본과의 국제 무역 등의 다양한 장시가 있다.

 

▲ 오색시장 입구

 

우리나라에 시전이 처음 설치가 된 것은 조선조 태종 때부터이다. 서울의 종로통에 행랑이라는 관에서 주도하는 상가를 만든 것이 시전의 효시로 본다.

 

관에서는 이러한 점포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대여해 주고, 그들에게서 점포세와 상세를 징수하였는데, 점포세는 행랑세’, 상세는 좌고세라고 불렀다. 이 시전은 궁중과 관부의 중요한 자금 조달원이었는데, 주로 독점적인 상점이었다.

 

▲ 오색시장

 

15세기 후반 지방의 장시 시작

 

지방에서 발달한 장시는 15세기 후반에 전라도에서 시작하여, 16세기 중반에는 충청도와 경상도에까지 전파되었다. 17세기 말에는 정부에서도 일반적인 장시를 승인하였으며, 18세기 전국의 장시는 약 1,000개소에 달하였다. 당시의 장시는 5일마다 정기적으로 서는 5일장이 일반적 형태였고, 지역에 따라서는 10일장과 3일장 등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당시의 기록을 보면 성종실록 권 27에는 성종 42월에 상설 상점의 설립은 백성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경인년(1470)에 흉년이 들었을 때 전라도의 백성들이 서로 모여 상점을 열었는데, 그 이름을 장문(場門)’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것에 의존하였으니, 이는 바로 지방에 상점이 만들어질 기미였다. 호조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지방 수령들에게 물었다.

 

그때 수령들이 그 이해관계를 잘 살피지 않고 전에 없었던 것이라는 이유로 모두 이를 막고자 했다. 나주목사 혼자만이 이를 금지시키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호조에서 금지시키고 말았다.라고 적고 있다. 곧 전라도에서 흉년이 들어 처음으로 장시가 열렸다는 것이다.

 

▲ 장에서 먹는 막걸리

 

장시는 흉년을 이기는 방법

 

명종실록 권 6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명종 29월에 이황이 상소문을 올렸는데 전에도 흉년이 든 해에는 장시를 금지하지 않고 백성들이 그곳을 토대로 하여 생활하게 함으로써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지금 흉년을 당하여 장시를 모두 금지시키면 백성들이 입는 피해가 클 것이니 금지령을 철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적어 흉년에 백성들이 서로 장시를 열어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백성들 간에 자유롭게 이루어지던 장시의 형태는, 임진왜란 이후에는 지역마다 정해진 장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양반들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조선조 말의 장시는 한 때 전국적으로 상당한 숫자가 개설되어 있었다.

 

만기요람에는 19세기 초 우리나라의 장시는 8327개 군, 현에 1,061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장시 숫자가 인구수에 비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장시의 숫자가 많은 것은, 지금처럼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근에 있는 장시를 이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임원경제지를 살펴보면 순조 30년인 1830년에는 전국에 1,052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장시가 조선조 말에 들어서는 단순히 장의 기능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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