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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 사적 제145호 전북 고창읍성 - 부녀자들이 성을 도는 ‘답성놀이’로 유명한 곳
  • 기사등록 2015-10-02 09:2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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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하주성 기자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에 소재한 사적 제145호 고창읍성.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 사적 제145호 고창읍성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인 고창읍성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 답성놀이란 일명 성밟기, 성돌기라고도 하며 부녀자들이 한다.

 

이 놀이의 목적은 대개 마을의 평안과 개인의 액막이를 겸하는 것이나, 외적을 방비하는 성을 1년에 1번씩 점검하고 발로 성을 밟아 견고하게 다지는 목적도 있다. 유명한 곳은 개성, 고창, 영광이다.

 

고창의 답성놀이는 주로 부녀자들이 머리에 작은 돌을 이고 모양산성을 돌아오는데 3번 도는 것이 특색이다. 이렇게 하면 소원성취를 하며 다리에 병이 없고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믿는다. 머리에 이고 가는 돌을 떨어뜨리면 불길하고, 성을 2번만 돌고 와도 좋지 않다고 믿는다.

 

▲ 성문 주위에 옹성을 쌓아 문을 보호하고 있다
 

동헌 등 22개 전각이 있던 고창읍성

 

성 안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병화 등으로 소실이 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읍성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은 바로 정문이자 북문인 공북루를 만나게 된다. 공북루 앞에는 옹성을 쌓아 적의 침략에 대비를 하였는데, 이러한 축성방법은 고구려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옹성위에는 여장을 쌓아 성안에서 성밖을 관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 안으로 적이 성문을 부수기 위하여 들어온다고 해도, 옹성에서 쏟아 붓는 화살과 기름, 돌 등으로 버티기가 힘들다. 더욱 옹성 안이 좁아 그 안에서 성문을 부술 수 있는 공성무기를 사용하기도 힘들다. 옹성에는 밖으로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현안과, 총안을 내어 놓았다.

 

공북루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옥사가 있다.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관옥 또는 원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옥사는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가 짓고, , 여를 구분하여 가둘 수 있도록 하였다. 옥사의 주변에는 높은 담을 둥그렇게 둘러치기 때문에 원옥이란 이름을 붙였다.

 

▲ 성 안에 있는 옥사
 

관리사무소 뒤에는 향청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향청은 지방의 방백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 지방의 향리를 구찰하고, 향풍을 바로잡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향청에서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약수터가 있다. 성안에서는 식수가 가장 중요하다. 오랜 시간을 적과 대치를 할 때는 식수가 없으면, 그만큼 버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약수터를 빗겨서 풍화루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옆에는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풍화루는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기록에는 고창읍성 안에는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다고 했다. 풍화루란 글 그래도 고을의 풍년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지어진 정자다.

 

백성을 생각하는 수령이 있던 고창읍성

 

풍화루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고창 동헌과 내아가 있다. 동헌이란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 현 등 각종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는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동헌이라 하였다. 동헌의 정면에는 평근당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는 백성과 가깝게 있으면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묵는 객사

 

동헌의 옆에는 내아가 있다. 내아는 고을 수령의 살림집을 말한다. 흔히 동헌을 내동헌과 외동헌으로 구별을 하는데, 외동헌은 집무를 보는 곳으로 이를 동헌이라고 하고, 살림을 하던 내동헌을 내아라고 부른다. 동헌의 앞쪽에도 숨겨 놓은 듯한 우물이 있다.

 

동헌에서 남서쪽으로 높은 곳에는 고창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을마다 있던 객사는 중앙에는 몸채라는 정당(正堂)이 있다. 정당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궁궐을 에를 올렸다. 양편에 있는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고창객사의 현판에는 모양지관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고창을 모양이라고 했고, 성을 모양성이라고 한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객사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연못 조금 위편에 작청이라고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는데 이방과 아전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다. 작청에서 북문 쪽으로 내려가다가 우측을 보면 관청이 있다. 관청은 관주라고도 부르며, 이곳은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일을 맡아하는 곳이다.

 

관청에서는 수령과 그 권속들, 그리고 빈객에 대한 예우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모든 물품의 조달과 관리를 맡아하던 곳이다. 현재까지 성안에 자리한 복원된 건축물 돌아보았다. 관청에서 옆으로 난 소로길을 이용하면 성곽길을 오르게 된다. 올라가다가 보면 소나무 숲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는 한다.

 

▲ 풍화루
 

치성을 쌓아 적을 공격

 

성 위로 오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치다. 고창읍성에는 6개소의 치가 있는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치란 꿩을 말하는 것으로 성곽의 일부분이 밖으로 돌출이 되어있는 것을 일컫는다.

 

이 치의 용도는 상당하다. 적이 성벽을 기어오를 때 치에 있던 병사들이 공격을 하면, 적은 뒤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다. 고창읍성의 경우에도 지형지세를 이용해 성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치와 옹성에서 바라다 보이지 않는 곳은 성의 한 부분을 굴곡지게 쌓아 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천천히 걸어 성의 남쪽으로 향하니 읍성의 동문인 등양루가 나타난다. 동문 역시 옹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를 하였다. 수원 화성이 국가적으로 온 나라가 나서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했다면, 고창읍성은 전라우도인 고창, 고부, 김제, 무장, 영광, 옥구, 용안, 장성, 정읍, 제주, 진원, 태인, 함평, 흥덕과 전라좌도인 능성, 담양, 순창, 용담, 임실 등 19개의 군과 현 등에서 모인 사람들이 3년 동안을 쌓은 성이다.

 

▲ 아전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작청
 

성 밖에는 각 고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맡아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고 갔는데, 일부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자 재현을 시켜 성 밖에 구간별로 세워 놓았다. 이렇게 민초들의 힘을 쌓은 고창읍성은 크지는 않지만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쌓은 성으로 매우 견고한 성곽이다.

 

등양루는 동편 오르막에 세워져 있다. 등양루를 지나 동치 쪽으로 오르다가 보면 얼마나 잘 축성된 성곽인지 그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문인 등양루를 지나 성을 타고 한 바퀴 돌다가 보면 동남치와 남치를 거친다. 그런데 고창읍성에는 남문이 없다. 일반적인 성들은 문이 동서남북에 있는데 비해, 남문이 없다는 점이다.

 

남치의 안쪽을 보면 상황사가 있다. 요즈음은 성황당이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이 있는 곳으로 마을의 수호신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성황사가 고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황사에서는 성황신을 내려 모시고 고을의 방백이 직접 제를 올렸다.

 

▲ 사적 제145호 고창읍성은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성황사를 거쳐 성곽을 타고 내려오면 서남치를 거쳐 서문인 진서루가 나타난다. 진서루의 형태는 북문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옹성을 쌓아 놓았다. 진서루를 둘러보고 내려오면 공북루로 돌아오게 된다.

 

20여리가 미치지 못하는 고창읍성. 그러나 성을 돌아보면 그 성을 쌓은 민초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축성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민초들이라고 달라질 수가 없다. 고창읍성을 돌아보면 호국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작지만 아름다운 성곽. 오늘 고창읍성은 오랜 역사를 그렇게 지켜보면서 말없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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