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서원
oshong 기자 2011-05-13 12:31:00
on: none; mso-padding-alt: 0.0pt 0.0pt 0.0pt 0.0pt">경기도 오산시 내삼미동 753-2에 위치한 문헌서원은 고려시대의 유학자 문헌공 “최충”선생을 중앙에, 우측에는 문화공 “최유선”, 좌측에는 문장공 “최유길”을 봉안한 영정각과 강당을 겸한 2층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영정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 에 청기와를 얹은 팔각지붕의 건물로 1991년에 건립.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을 전후하여 동방성리학의 조종인 동시에 벼슬이 인신의 극에 달했던 문헌공 선생을 모신 “문헌서원”이 항해도 해주에 세워졌다.
이후 황해도 관찰사로 하여금 몇 차례의 이동과 정비를 하면서 1945년 남북의 분단되는 시점까지 온존하게 보존되었다. 문헌서원은 최충선생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로서 현재 남한에는 두 곳의 서원이 있다.
그래도 본거가 되는 서원은 해주의 “문헌서원” 이므로 남한의 20만 해주최씨 대종회인 들은 북한 해주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못내 쉽게 생각하여 오산에 재건립 하였음.
향사인물 중 최충은 《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농번기의 공역 금지 등을 상소하여 민생을 살폈으며 동여진을 경계하는 등 국방 강화에도 관심을 두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로 불렸으며, 관직을 그만둔 뒤에는 사숙을 열어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다.
문헌서원으로 가는 교통편은 대중교통으로 123, 61, 201, 20, 301, 200, 7, 7-6, 300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이후 황해도 관찰사로 하여금 몇 차례의 이동과 정비를 하면서 1945년 남북의 분단되는 시점까지 온존하게 보존되었다. 문헌서원은 최충선생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로서 현재 남한에는 두 곳의 서원이 있다.
그래도 본거가 되는 서원은 해주의 “문헌서원” 이므로 남한의 20만 해주최씨 대종회인 들은 북한 해주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못내 쉽게 생각하여 오산에 재건립 하였음.
문헌서원으로 가는 교통편은 대중교통으로 123, 61, 201, 20, 301, 200, 7, 7-6, 300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