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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이종철의 오지탐험> = 「고요의 요람 풍광 안도전 마을」

 

제6편-강원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 안도전 마을

 

▲ 안도전 마을로 접어드는 골지천의 징검다리. 반쯤 놓인 형상이 오래 전 놓인 듯하다.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 안도전 마을.

 

내면과 풍광이 새색시 같은 고요의 요람이다.

 

강원도 정선군 임계에서 42번 국도를 타고 8km 가다 상경바위산(758m)을 우측으로 끼고 임계초교 도전분교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3km 지나 분교 뒤로 내도전·외도전 마을이 펼쳐진다.

 

▲ 내도전은 넓고 돌이 크며 암반이 바닥을 덮고 있어 웅장하다. 입체감

나는 남성미의 계곡이라 할 수 있다.

 

이조시대 때는 장아리로 불렸다.

 

사색당파와 권좌에서 밀려난 양반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당시 300호가 넘는 큰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양쪽 계곡 사이에 7가구가 단촐하게  옛 명성을 간신히 잇고 있다.

 

▲ 외도전 계곡은 좁고 잔돌이 많아 흡사 시냇가 여울을 만지는 여인네의 소박함이 살아 있다.

 

초기는 임야를 화전으로 일궈 약초농사를 크게 지으면서 약초마을로 불렸으나, 정부의 산림녹화 및 산화방재 정책에 따라 국유지 무단점유가 중지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게 되자 이농(離農)이 시작되면서 단란한 오지마을로 변했다.

 

일반 양봉보다 수익이 10배 정도 높은 토종벌을 많이 치어 지금도 마을 입구 간판에  ‘토종벌 마을’이라고 새겨 있다.

 

▲ 마을의 토종벌통. 예년 같지 않고 많은 토종벌이 자연사하는 현상에 벌통 수가 줄어 든다.

 

굽이굽이 사행으로 이어지는 골지천 계곡을 따라 해발 645m의 너그니재를 넘어 우측 왕치산(902m)과 좌측 덕우산(1천8m)을 끼고 42번 국도로 이어지는 여정은 산과 물과 계곡이 어우러진 비경이 두 바퀴로 달리는 오토바이를 걸음마 하듯 지체하게 만든다.

 

1945년 해방 무렵 당시 18세 2살 터울의 처자와 결혼한 박내열(86)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부친의 소 사육에 매달리면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그야말로 무학이다.

 

중간에 큰아버님이 마을 훈장이라 4년간 어깨너머로 한문서당에 다닌 공부가 전부였다.

 

박내열 옹은 해방 뒤 약초와 채소를 크게 짓는 집에서 소를 7마리나 키워 동네에서  ‘부유하다’는 소리를 듣는 집안의 맏이였다.

 

▲ 아직 남은 소죽 가마솥. 쌀 4가마는 족히 들어갈 크기로 7마리 소를 키우던 솥이다.

 

6·25 지리산 공비시절 공비괴수 권일·이호재가 이 마을에 60여명의 빨치산을 주둔시키면서 박내열 옹은 운명의 여정을 달리하게 된다.

 

양민들을 학살하고 소를 강제로 탈취해 군량에 도륙(屠戮)당하고 농사 수확물도 약탈하는 등 피나는 혼돈시기에 근근이 명을 유지하던 가운데 6·25가 발발했다.

 

한 번은 국군에게 소와 가축을 징발당하고 후반에는 인민군이 주둔하면서  다시 약탈을 감내하는 동안 집은 전화(戰火)로 소실되고 빈털터리 신세로  그저  ‘없을 무(無)’ 그 자체였다.

 

당시 소 한 마리면 토지를 500평 이상 바꿀 정도였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6·25 전쟁 뒤 잘 나가시던 부친은 집안이 몰락하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박내열 옹은 졸지에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

 

▲ 정연하게 정리된 농기구와 자재들. 주인의 품성이 엿보인다.

 

장독대로 가는 어귀엔 지금도 사용하는 농기구 보관대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흡사 대장간 판매 진열대 같아 보인다.

 

“옛날 한창 농사 때는 이 보다 10배는 많았더래요. 온 동네에서 허구헌날 농기계 빌리러 오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는데…….”

 

나란히 정돈된 농기구를 보며 할아버지는 순간 입맛을  ‘쩝~’하고 다신다.

종전 뒤 친척집에 의탁하며 전전하던 차에 현재의 집을 조금씩 이어 지으며 입에 풀칠하면서 사는 전후 초기의 삶은 그야말로 인간이 아닌 야수와도 같은 형국이었단다.

 

어느 날 끼니가 떨어지면 어머님의 한 덮인 한숨을 뒤로하고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남들이 안 보는 이른 새벽 시간에 친구집을 찾는다.

 

당시 친구 아버님이 산판을 하기로 동네에서는 부자로 사는 친구집에서 쌀 두어 되, 좁쌀 한 되를 얻어 몇 끼를 해결하곤 산판이 열리는 날부터 산판노동으로 대신 갚는 등 피말리는 허기와의 전쟁이 지금도 뇌리에 어른거린다고 회상하신다.

 

박내열 옹은 오로지 정직과 근면으로 오늘날까지 온 가족과 식솔을 부양하신 순수한 촌로다.

 

2009년 6월6일 현충일날 호흡기 질환으로 투병하던 아내마저 저 세상으로 일찍이 보내고 근자까지 마을 노인회장 일을 6년이나 봐왔으며 지금은 건강이 여의치 않아 주말마다 도시에 있는 아들 며느리가 자주 들러 건강도 챙기고 농사일도 돕는 것으로 소일 하고 계셨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삶의 회한이나 특별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심 좋은 고향에서 별탈 없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드래요. 이 나이에 아들딸 대성하고 손주, 조카 보며 자적하니 무얼 더 바라겠소만……. 교육도 받아 보지 못하고 본인은 속아도 봤지만 평생 남을 속여 본 적이 없고 아무런 욕심 없이 고민이 생겨도 스스로 헤아리고 희석할 수 있으니 그 무엇이 낙원일까요.”

 

앞산의 높은 봉우리를 보시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짧고 의미 있는 한숨으로 버무려 내시는 할아버지의 눈가에는 수십 년 인생의 파노라마가 희미한 그림자로 투영돼 필자의 눈에도 비춰지는 것 같았다.

 

필자가 스케치 하는 동안 박내열 옹은 나름대로 치장이 필요했던지 두 차례나 우물가로 가셔서 단장을 하시는 바람에 공연히 부산을 떠는 필자가 미안스러워 자꾸만 말을 건네며 한참을 재미있는 대화 속에 스케치를 완성했다.

 

▲ 이종철 오지연구소장이 그린 박내열 옹 초상화.

 

“생전에 그 그림 내가 볼 수 있을런지…….”

 

중얼거리듯이 하시는 말씀에 퍼뜩 긴장감이 뇌리를 친다.

 

“내년쯤 제가 한번 이곳에 다니러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꼭 이 그림을 보셔야 합니다.”

 

말을 하는 동안 내 손을 꼬옥 잡은 박내열 옹의 손은 죄여오는 아귀의 힘이 미미하게 느껴짐에 필자도 모르게 씁쓸한 마음이 온 몸을 감싼다.

 

박내열 옹의 안면에 스며있는 초상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우리네 인생사의 만고풍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듯하다.

 

▲ 박내열 옹의 자택. 너른 앞마당과 부엌, 사랑채로 보아 옛날에는 꽤나 큰 집이다.

 

하룻밤 얘기나 하며 묵고 가라는 박내열 옹의 만류를 어쩔 수 없이 사양하며 부디 건강하시고 다시 뵐 때 정정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기를 몇차례 간원하며 돌아서는 필자에게 흘려보내는 박내열 옹 얼굴에 한없는 아쉬움과 연민의 정이 흠뻑 배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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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3-08-22 15: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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